작가노트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라도 나의 내면 속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모두가 각자 힘든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힘들다고 생각되는 순간마다 감정을 타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오직 혼자서 감내하고 해소해야 할 것들이다. 이렇듯 쉽게 내뱉지 못하고 꽁꽁 숨겨두거나 방치하게 되는 감정은 점점 커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당할 수 없이 커져버린 감정들은 내면의 공간을 갉아먹으면서 스스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만든다. ‘나’라는 존재의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를 잃어버리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대해 무감각해졌을 때가 있었다. 마치 따분한 흑백 다큐멘터리를 보듯이 세상을 바라봤다. 누군가 의견을 물어볼 때면 ‘아무거나’, ‘다 괜찮아’라며 그들에게 나를 맞추고 스스로를 찾으려하지 않았다. 오늘의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사람들과 무엇을 하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무력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내면 속에 가둔 채로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며 자아가 희미해지고 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 말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내뱉지 못한 채 내면에서 묵혀진 감정과 생각을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외부 간섭이 들어올 수 없는 내면의 공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되돌아봤다.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전의 흑백의 다큐멘터리라고 느꼈던 세상은 그렇게 다채로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과 대화하며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오롯이 스스로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편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정한 곰팡이
생각만 해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햇살이 유난히 좋았던 어느 봄이라든지, 쏟아내는 감정을 아무 말 없이 안아주는 누군가의 모습, 순수한 아이들의 미소 등 살아가면서 느끼는 중요하면서도 쉽게 지나치는 일상들이다. 이러한 기억 속에는 ‘다정함’이라는 감각이 살아있다. 작지만 따뜻한 힘을 가지고 있는 다정한 일상들은 자신이 슬픔의 심연 속에 빠져 있어도 어느 순간 스스로 걸어나올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나는 무심코 지나쳐버린 일상 속에 놓치고 있었던 ‘다정함’이라는 감각에 집중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디서든 떠다니며 존재하고 있는 곰팡이는 균사로 이루어진 생물의 한 분류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생물이지만, 특정 온도나 습도에 반응하여 점점 군집이 커지면 그제야 사람이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곰팡이에 ‘다정함’이라는 수식어를 연결하여 감각을 시각화하는 매개체로 작용하게 한다. 한없이 다정한 존재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다정한 곰팡이’는 지친 사람들을 안아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존재이다. 그들은 마치 곰팡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다가 다정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반응한다. 그렇게 서로 모이게 되면, 하나의 작은 덩어리부터 시작해 커다랗게 몸집을 키워 공간을 만든다. 다정한 곰팡이는 감각을 시각화한 매개체로, 관객에게 온도, 기억, 감정 등 복합적인 뜻을 내포한 ‘다정’이라는 단어에서 저마다의 감정과 경험을 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