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play a wrong note is insignificant. To play without passion is inexcusable!”
(연주할 때 틀리는 음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열정이 없는 연주는 용서할 수 없다!).
뮌헨 음대 출입구·경비실 옆 3번 방 벽엔 독일어 원문으로 된 Beethoven의 가장 유명한 명언이 포스터로 붙어있다. 유학 시절 렛슨 시간, 이 문구의 해석을 요구하던 교수님께선 나에게 예술의 근본적인 질문과 답을 끊임없이 던지셨다. ‘베토벤의 말에서 네겐 당장 앞의 말이 더 중요하다. 멀리 있는 이상보다 눈앞에 정확성과 완벽함에 대해 생각해 볼 것’. 기계적으로 들리는 음악을 기피하던 나에게, 추구하던 방향성과 정반대의 표현 요구는 큰 과제였다. ‘또한 음악은 suffering 하는 것이 아닌, happy 하려고 하는 것’. 고통과 번뇌가 환희와 해방이 되는 순간이란? 벽에 붙은 포스터 속 베토벤은 렛슨 때면 항상 나와 눈을 마주친다.
‘기술적으로 흠이 없고 연주자가 배제된, 작곡가와 곡 그 자체가 완전한 연주를 추구하는가?’. 정확성과 철저히 이성적인 음악. 어릴 적부터 비슷한 수준의 또래 사이에서 경쟁은, 결국 정확성과 완벽함을 요구해 왔다. 이에 있어 항상 기본기와 기초의 근본적 문제점을 마주하게 된다. 덕지덕지 화려하기만 한 결과물을 처음부터 다시 건축하기란 항상 겁이 나고 귀찮다. ‘겸손’은 결국 깨끗함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나에게 찾아온다.
오는 15일 안려홍과 맹진석의 조인트 리싸이틀
“겸손(humilitas)이란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다.”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겸손에 대한 정의이다. 자신과 비교하여 높은 이상으로부터의 배움과 깨달음 그리고 낮아짐...... 무결하고 이성적인 음악 또한 완벽함의 감동일 수 있으므로. 교수님께선 베토벤을 통해 깊이 있는 메시지와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감동만을 고집하던 내게 깨우쳐 주시고자 하심이 아니었을까?
‘담아내고자 하는 내면의 세계와 철학이 감각적으로 청자의 심금을 울리는가?’. 음악을 감상할 때 청자는 음악 속에서 저마다의 이데아와 메시지를 느낀다. 또한 그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베토벤이 말하는 열정적인 연주란 결국 조화와 자유일 것이다. '천문학', '기하학', '수론', '음악' 이들은 1,500년 전 신이 만든 세상의 조화를 연구하기 위한 학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규칙과 규율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자유를 위함이 오히려 규칙적이고 규율적이라니.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 교수님은 자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유란 자신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 즉, 자율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내가 바라는 인생을 살기 위해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작곡가가 악보에 기보해 준 규칙과 규율들이 연주자를 통해 세계화되고 감각이 현실화된다. ‘감각의 재현’, 내 머릿속에 보이고, 들리고, 맡아지는 모든 것들이 전달되었는가?
무대에서 시간은 반복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며 감정이 움직일 때 관심과 의미가 생긴다. 때론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흘러간 것들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어른이 되어가며, 감정을 억누르거나 죽이는 기술을 얻을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다음부터는 무감각하거나 무기력하며, 기억나지 않는 오늘들이 점차 많아진다. 연습실에서, 무대 위에서, 악기 앞에 앉을 때면 나의 노래가 소중하고 설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항상 기도한다. 반복되지 않는 시간과 흘러가는 음악 속에서 더 이상 노래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적어도 베토벤의 말 속에서 배워온 겸손과 자유가, 나를 위해, 내 음악이 들리는 모든분들을 위해 추억되기를.
글 맹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