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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애호가에서 레슬리 하워드와 작업하기까지

내가 리스트를 연구한다는 사실을 들으면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왜 리스트를 좋아하시게 되었나요?” 하지만 정확히 리스트 음악의 어떤 점이 나를 사로잡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리스트와 관련된 가장 오래 된 기억은, 리스트가 편곡한 베토벤 교향곡의 악보를 열심히 출력하던 나의 모습이다. 아마도 9살 혹은 10살 무렵 나는 베토벤의 교향곡에 푹 빠졌었고, 피아노로 칠 수 있는지 찾아보다가 리스트가 전곡을 솔로 피아노로 편곡한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5번 1-3악장을 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나는 리스트라는 작곡가를 알게 되었고 매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나는 피아노 레슨을 받지 않았다. 전공을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한 작곡가에 몰두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전공을 하다 보면 나의 기호와는 상관 없이 어쩔 수 없이 쳐야 하는 곡들이 생기고, 우선순위가 생기니 말이다.
리스트에 빠져 있는 시간은 계속 되었고, 레슬리 하워드(Leslie Howard)의 리스트 전집은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들이다. 용돈을 모아 샀던 중고 아이팟 클래식에 100장이 넘는 시디를 다 넣어 하나씩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특히 노르마의 회상(Réminiscences de Norma, S394)과 소나타(Sonate, S178)를 몇백번은 들었었던 것 같다.
사실 중학교 시절 나의 꿈은 식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공부에 그리 재미를 붙이지는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는 기회가 오지는 못했을 것 같다. 중학교 3학년때 우연히 충남예술고등학교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당시까지 콩쿠르는 한번도 나가 본적이 없었지만 우연히 나가게 된 이 콩쿠르에서 1등상을 타게 되었다. 이때 연주한 곡이 바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중 12번, 눈보라(Etudes d'exécution transcendante, S139 No. 12 Chasse-neige)이다.
아티스트와 프로그램을 논의 하는 중에는 현대 작곡가들의 작업과 비교적 익숙하지 않은 리스트 후기 곡에 대해서 자주 언급 되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대해 상의하는 본인의 마음 속에는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 만이 있었는데, 먼 과거 그의 학부 졸업 연주에서 리스트 초절기교 전곡을 연주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기도 했고, 이것을 기다리는 애호가들이 많다는 것을 확신 했기 때문이다. 공연은 티켓 오픈 4일째 되는 날 매진 되었다.
콩쿠르에서 예상치 못한 상을 타고나서 전공을 해보겠냐는 물음에 무심코 해보겠다고 한 것이 음악 전공의 시작이었다. 입시까지 약 4개월 정도 남은 때였다. 사실 고등학교 입시까지는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원래 다른 학교를 준비하다가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가게 된다면 마음껏 리스트 연습곡을 연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준비하던 곡을 버리고 리스트의 연습곡으로 곡을 바꾸기도 했다. 입시를 며칠 앞두고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피아노를 제대로 배운 시기이기도 하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리스트를 좋아하셨고, 내가 고른 알캉의 연습곡이나 온갖 이상한 리스트의 작품들도 흔쾌히 배우게 하셨다. 실기우수자 연주회에서는 도깨비불(Etudes d'exécution transcendante, S139 No. 5 Feux Follets)을, 첫 향상음악회에서는 저녁의 선율(Etudes d'exécution transcendante, S139 No. 11 Harmonies du soir), 그리고 다음학기에는 무조성의 바가텔(Bagatelle sans tonalite, S216a)를 연주했던 기억이 난다. 저녁의 선율도 그렇지만 아마 무조성의 바가텔이 다시 향상음악회에서 연주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대학에 들어가 만나게 된 교수님께서는 수년간 내게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고, 그렇게 가게 된 영국에서 6년이 넘게 지내며 박사과정까지 밟게 되었다. 박사 과정으로 리스트를 연구하며 어린시절 레코딩으로만 접했던 레슬리 하워드를 실제로 만나고, 이제는 같이 리스트 작품 카탈로그 출판을 앞두고 있다.
어린시절의 사소한 결정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앞으로의 결정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마 리스트의 음악은 함께하지 않을까 한다.
글 김민규 / 편집 이지호
김민규, ARTIST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