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케인가?
소케는 내 페르소나이다. 뜻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뜻으로 "hoc quoque transibit" 라는 라틴어의 약어이고 교만, 낙심하지 않게 용기와 희망을 받기 위해 다윗 왕이 반지에 새겼다고 한다. 되새김할 수 있는 필명을 해놓으면 좋지 않을까한 아이디어에 착안했다. 페르소나를 갖추면서 가면을 덧입음으로써 자유로운 표현하기 위함이었고 세계관의 도입부로 한 발자국 몰입감을 주기 위함이 있다.
왜 푸른 피부와 붉은 머리 캐릭터인가?
생김새는 책 '달과 6펜스'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모티브를 가져왔다. 푸른 피부, 붉은 머리, 큰 코를 가지고 넓은 어깨를 가진 스트릭랜드. 괜찮은 직장은 다니고 가족을 부양하다가 모든 걸 비워내고 한 평생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기를 하며 생을 마감한다.
예술 창작에 관한 생각은?
사람은 각자마다 가치관이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분리된 생을 살아 각자의 색안경이 씌워진다. 이것은 각자 '이상'이 다르다고도 연결된다. 그래서 발자취가 다르며, 우리 자유의지로 인해 선택이 다르다. 그래서 난 가치관이 다른 인간들이 살아온 기간 동안 그것을 작품관에 옮기고 정리한 것을 전기(傳記)라고 부르는데 각자의 최고가치는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향해 달려온 모습을 그대로 옮기면 된다. 사람은 무의식에 계산을 하고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비커에 물 따르듯 움직인다. 해서 항상 최고의 가치가 있는 곳에 움직인다. 그렇기에 후회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풋을 보면 당사자는 항상 최선의 선택이었고 최고의 선택이었다. ('나'로 살아가는 것에 중점을 두면 그렇고 사회 속의 '나'로서는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전책을 좋아한다. 보통은 몰입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고, 이야기로 인해 시대가 지나도 관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통찰력에 끊임없이 인기있고 생각해볼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대게 시작과 끝이 있고 감동의 포인트가 있다. 난 각자의 최고이자 좋은 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우리를 한 전기의 영웅이자 각자의 스승이라고 보고 싶다. 그래서 예술에 관하여서는 어느 누구도 예술가가 될 자질이 충분하고 오히려 인간으로서 당연히 수행해야할, 사회 전체의 이타주의적 관점에서 서로를 위해서 당연히 수행해야할 의무라고도 보여진다. 내가 옳다고 느끼는 것이면 사회를 위한 기여하려고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어떤 최소한 개인에게는 대게 필요할 것이며 생각의 확장에서라도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어떤 개인에게 던지다 보니 곧 사회를 위해 던지는 것일지 모르겠다. 내 메시지는 '나의 색안경'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평범함의 소재더라도 가장 이상적인 올곧은 창이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추상적이지 못해 개인의 사고를 막지만 좀 더 직접적인 감동을 일으킨다. (무엇은 무엇이라고 명제하는 것은 창의성을 막는다고 본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좋게 창의적인 재료로 쓰지만 부족한 사람이라면 알려주어야 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져야 할 때도 있다.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게 나의 색안경이다. 가끔은 다른 사람의 색안경(이야기)을 선물받아 각자의 바라는 가치를 대신 옮겨 그려주기도 한다.
난 내가 아침에 일어나 피는 기지개 한번, 혼자 밤에 춤추는 그림을 한번, 혼자 생각하는 장면을 한번, 고뇌에 아파함을 한번, 내가 좋아하는 상의 이성을 한번,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번, 그냥 오로라 보고 싶어서 그린 한번 무엇이든 스쳐가는 것을 잡아다가 캔버스에 옮긴다. 색안경을 공유하는 것은 예술가에게 흔한 일이며 일반인들은 개인이 만들어낸 보편화되지 않은, 불편한 색안경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보편화되지 않은 안경에는 어쩜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깊이 있는 작업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
1. 탄생과 죽음에 대한 성찰
2. 순간
3. 방황
나는 이것을 '생(生)'이란 단어를 중심으로 두고, 그러니까 삶을 사랑해서 또는 사랑하기 위한 관찰과 사색을 기반해 작업에 참여한다. 생을 쪼개 '순간'이 존재하게 되는데 내가 보는 '생' 안에 눈에 비치는 프레임들은 순간 안에 영원하다는 걸 깨닫고, 순간 속 이성이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이 즐거움을 주는 것을 포착해 개인전 '우리의 순간'으로 시작해서 본격적인 전시 활동이 시작됐다. 2023년 끝 무렵부터 방황이란 단어가 긍정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좌절과 성취의 반복으로 그려지는 발자국들 자체를 작품으로 보고 작업으로 옮겼다.
2023년 무심하게; 아침과 새벽사이 전시 산문으로 옮긴 시
아침과 새벽사이
나도 모를 때가 있다. 식탁보를 뒤집어쓴 갈색을 발판으로 백로처럼 움직이는 섬유끝 흰 캔버스가 마주할 때 하루 시작과 끝이 또 마주하는 잔상 붉고 푸른 온도를 고른 사진 한 장 속 내릴 햇살에 나의 목소리를 녹음해 나는 나를 마주해 가끔은 잊어버려 그냥 취해버려 하늘 아콘크리트를 과녁삼고 싶어? 어딜 찍고 싶은 걸까 너도 모르게 심은 곳 향유하는 사람들이 있어 뛰는 걸음에, 나도 몰래 뛰던 발걸음 내가 보고 있던 무심천 내 돌아본 걸음엔 푸른 잎들과 함께쓰네 너는 붉게 나는 푸르게 피었고 어스름을 기준삼아 앞뒤로 바뀌는 조명 아래 아침과 새벽사이의 설명을 붙이자면 방황 속 피어나는 우리의 이야기는 회고할만한 가치가 충분하고 회고는 지평선의 스케치가 되어주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길의 걸음에 좋은 등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