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9일 오후 8시 30분
피아노를 처음 만진 건 네 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흥미 있는 것은 빠르게 습득했기에 배우는 과정에는 막힘이 없었다. 악보에 그려진 대로 건반을 누르면 곡이 연주되는 것을 좋아했다.
“음악을 공부할 거라면 최고의 학교로 가라” 피아노를 행복해하던 중 부모님께서 내게 해주신 말씀이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재능을 확인해 보고 싶으셨는지 나를 대전 예술의전당 아카데미에 등록시키셨고 그렇게 처음 강사 선생님께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동네에서는 잘한다는 이야기만 들어왔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선생님께서는 내게 기초 테크닉이 없다고 하셨다. 손가락으로 건반을 제대로 누르는 방법부터 다시 쌓아야 했다. 음악이 너무 좋았기에 기초를 다지기 위한 지루한 훈련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결론적으로는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성실하고 무난했던 성장 과정으로 보이겠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가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제대로 일을 하는 분이었다. 나는 이러한 전후를 일찍이 깨달았고 공부와 연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성실한 성장기를 보냈어야만 했다.
당시 내 피아노는 서울예고에 안정적으로 진학할 만큼 완성 되어있지 않았기에 높은 수준의 내신 점수가 필요했다. 인문계 중학교에서 과학고와 외고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경쟁해야 했고 매 중간, 기말고사마다 10권 이상의 교과서와 참고서를 전부 외웠다.
아버지는 일에 쉽게 의욕을 잃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으셨기에 내 공부와 연습에 사활을 거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암담함 속에 어머니와 나에게 희망은 음악뿐이었다. 피아노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현실이 된다면 진로에 있어서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지워진 게 아닌, 현재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나를 진심과 사랑으로 가르쳐주셨다. 다양한 연습 방법으로 테크닉의 보완을 이룰 수 있게 해주셨고 레슨 중에 내가 조금이라도 서투르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나 또한 “이걸 못하면 피아노랑은 영영 작별이다.”라는 심정으로 배우는 과정에 빈틈이 없도록 이를 악물었다.
예고 시절은 막막한 기분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전국에서 피아니스트가 될 가능성이 가장 많은 청소년들을 모아놨으니 나는 곧 내가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느낄수록 매 순간 배움의 자세로 학교생활에 임했다. 다른 학생들이 연주하는 곡, 그들의 연습 방법을 눈으로 귀로 보고 따라 해 보았고 그것은 나에게 큰 경험치가 되었다.
스스로 지나치게 억눌러왔던 시간은 일상과 음악을 만드는 일에 있어 어려움이 되었다. 심기를 거스르면 물건을 집어 던져 부수거나 폭력을 휘두르시는 아버지 밑에서 나는 작은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두려움이 내면 깊게 자리 잡혀있던 나는 모든 행동이 어색했다.
나의 걸음, 대화, 눈빛 모두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자존감이 자라지 못한 것이다. 편히 쉬는 자세마저 오로지 자취방에 있을 때만 가끔 취할 수 있었다. 부모님과 나 자신 모두 ‘이준병’이라는 사람 그 인간 자체의 성장보다는 내 학업과 성과에 열중했어야만 했던 상황 속 내 정체성의 확립 따위는 존재할 여유가 없었다.
(계속)
글 이준병 / 편집 이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