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유학 입시에 낙방하고 베를린 중앙역 역사,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몰래 눈물을 흘리던 참담함은 잊을 수 없다. 한국 대입에 떨어졌을 때는 이런 좌절감이 있지는 않았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피아노를 잠궜다. 한국 대학에 떨어졌을 때는 입시제도라는 시스템 때문에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는, 부끄럽지만 탓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독일에서도 거절당하니 이건 나의 길이 아닌 것이라고 확신했다. 유년기부터 가장 사랑했고, 나의 자랑이었던 피아노. 하지만 이제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한다는 압박이 컸고, 먼저 병역을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최대한 빨리 가고자 했다. 현재의 나를 만들어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의 선생님과 부모님은 다시 도전할 것을 권면하셨음에도 대학입시와 유학 입시에 연속으로 거절당한 나는 피아노를 계속할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이제까지 양육하시며 애정과 지지를 보내주신 선생님과 부모님의 만류와 설득을 모른 척 할수는 없었기에 끝내 못이겨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꽤 오래 잠겨 굳게 닫혀있던 피아노를 열고 다시 건반을 눌렀을 때, 그때의 인상은 내가 피아노를 사랑하는 오랜 근거가 되었다. 마치 건반이 내 손을 감싸주는 듯했고, 다친 내 마음이 온전히 소리에 기대어졌다. 머릿속이 맑아지고 - 연속된 거절에 다친 마음을 털어버릴 용기를 잡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난관이 있더라도 내가 있을 곳은 피아노 앞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정한 위로는 나의 일에 있었던 셈이다.
입시의 낙방과 피아노를 사랑하는 것은 상관관계에 있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피아노를 치는 것이었고, 그다음 연도 시험에서는 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사실, 예원학교에도 낙방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무슨 용기였는지 중학교를 재수한다는 것이 지금보다 더 흔치 않은 일이었음에도 고민 없이 재수를 선택했고 동갑내기보다 일 년 늦게 예원학교와 더불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에도 합격하여 최고의 교수님과 최고의 선후배들 사이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독자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 내 음 악인생이 순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많이 배우고 이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행한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년 3월 귀국을 앞두고 있다. 여러 걱정이 앞서 혼란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항상 그래왔듯 나는 내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있다.
글 유현성 / 편집 이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