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섬세했던 탓에 작은 일에도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였던 기억들이 있다. 더불어 소심한 성격이기에 기억들은 나를 오래도록 괴롭게 하기도 했다. 괴로웠던 나는 그럴 때마다 일기를 쓰거나, 위로가 되는 음악을 찾았다.
일기
싸이월드를 이용했던 중학생 시절부터 기록된 일기들은 무려 삼천 개가 넘는 듯하다. 현재는 더 이상 일기를 즐겨 쓰지 않게 되었는데, 최근에 쓴 글들을 돌아보니 대부분 과거의 감정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가 경험한 다양한 감정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훌륭한 자료인 것이다.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를 즐기겠다고 다짐한 이후로는 대략 15년간의 방대한 자료에서 나 자신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의 감정과 반응 같은 것을 명료하게 인지하게 되니 다른 이들의 반응과 감정도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내 전문 분야에서 이 점은 타인이 바라는 음악과 소리에 대한 파악이 원활해졌다.
물론 타인의 필요와 요구를 수용할지, 반박할지는 여전히 자유로웠고, 나의 실내악 신조는 함께 아름다운 음악 세계를 만든다는 전제에, 나와 함께하는 연주자들이 내가 만든 소리와 더불어 어쩌면 나보다도 더 자유롭게 노래하게 하자는 데에 있다. 이는 피아니스트에게 다소 희생적인 이야기지 않을까라는 스스로을 향한 반문에 대해선 어떤 악기든지 실내악이란 함께 하는 것이며 함께 함이란 희생과 인내가 당연했다. 어쩌면, 독주곡을 다룰 때에도 필요한 덕목이라 답한다.
음악
일기와는 별개로 음악에 의한 데이터들도 적지 않다. 일기를 작성할 당시에 대부분 음악감상과 함께였다. 그리고 어떤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기억은 점차 없어져도 그때 느꼈던 모든 것들은 음악이라는 향기에 담겨있다. 예를 들어, 내가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으면 22살 쯤 어두운 자취방에서 홀로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아련함에서 오는 슬픔을 한잔씩 감내했던 추억이, 슈베르트 즉흥곡을 들으면 비슷한 시기에 느꼈던 상실감과 즐거움 그리고 상관없다는 듯이 옆에 있는 나무와 공기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는 듯 은근한 무심함 속 포근함이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떠오른다. 게다가 느낌뿐이 아니라 내가 일기로 다 표현하지 못한 그때 당시의 내 자신을 그 음악들만의 언어로서 존재한다.
데이터 작업을 정리함은 곧 마음 안에 담긴 이 음악적 향기들을 스스로 정렬 혹은 재창조하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감정의 스펙트럼을 더 넓히거나 세분화하기보단 지금까지 쌓아온 감정들을 이용하는 데에 더 자신있게 포커싱을 두고자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떠한 새 작품을 대할 때 작곡가가 어떤 메세지를 전하고 싶어 하는 가를 내 안에 담긴 음악 언어 중 몇 가지를 골라서 적용시키면서 추측한다.
이에 관련하여 실내악을 할 때 재미있는 점 중 하나는 어떤 메세지에 대한 추측을 A, B, C의 형태로 두고 우선 A를 제시했을 때 예상되는 반응은
1.
A가 괜찮아서 무난히 넘어간다.
2.
B 혹은 C를 해보자고 권한다.
3.
예상치 못한 D의 형태를 권한다.
이 정도가 있는데 이 세 가지 반응들이 전부 즐겁다. 특히 3과 같은 반응은 아직도 내가 더 쌓을 뉴(new)데이터가 있다는 점에서 당장엔 적용하기 어려워서 괴로울 순 있어도 결국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이는 자칫 음악을 함에 있어서 해로운 고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세운 추측들을 과감히 무너뜨릴 용기도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내 일상생활은 자아 성찰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 내 자신을 향해 갖게 된 믿음은 당장에 느끼는 괴로움, 즐거움 등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평안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낀다.
글 이준병 / 편집 이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