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세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언어나 감정으로 해석하기엔 더 깊은 상징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음악만이 가진 힘이며, 이 음악들을 탄생 시킨 작곡가가 탄생시킨 메세지보다 더 깊을 수 있다. 즉 작곡가의 의도 하에 음악이 탄생되나, 탄생된 음악이 미메시스 하는 세게는 작곡가의 의도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자유를 지닌다.
여기서에서 연주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감히 판단컨데, 현대사회의 불안은 20세기 초 산업혁명 시기의 분위기와 유사하다고 가정한다. 이때 유행하기 시작했던 상징주의, 더 나아가 모더니즘은 현대예술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데, 우리 연주자들은 그 시대의 사상에 대해 파악할 이유가 충분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존재를 자각해야 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바람의 존재는 어떤 요인으로 인해 생기게 되는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인의 과제는 이런 끊임없는 비가시에 대한 탐구하고 생각한다. 첨언하자면 슬픔, 기쁨, 분노 등 감정의 현상 너머로 또 다른 영역의 비가시적 요인을 말하는 것이다.
작곡가의 의도에서 벗어난 연주인가 또는 충실한 연주인가, 개성이 있는 연주인가 혹 예상이 가는 연주인가 등은 연주자가 곡을 해석하며 유념하게 되는 것들이다.
난 연주 악보에 그려져 있는 모든 것들은 작곡가가 창조해 낸 어떤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은 작곡가 스스로에게 향하는 방향일 수도, 작곡가에게 결여되어 있는 갈망하는 특정 세계를 가리키는 이정표 일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보통 클래식 연주자들이 종종 다루는 음악들의 작곡가는 대부분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탐구하는 게 늘 상이다. 하지만 이런 비가시적인 존재들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내면에 대한 고민이 곧 작품 해석의 풍부한 다양성과 깊이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산업혁명으로 고도화되고 있는 와중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었던 20세기 초반과 그 당시 감정적 체험, 영적인 존재, 인간의 내면 심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상징주의 예술의 도래.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음악가들, 그리고 연주자들. 내가 좋아하는 감성의 연주는 대부분 그 시대와 멀지 않는 시간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연주는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와 메세지를 준다.
어쩌면 그들은 작곡가들이 그려내고자 했던 세계를 그들만의 심도 있는 '상징'을 통해 이해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보는 현대사회는 그 당시 상황과 매우 유사해 보이고, 나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만이 가진 메세지를 전해주고 싶다.
어떻게 하면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 손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오늘도, 내일도 난 항상 고민한다.
글 이준병 / 편집 이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