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8일 오후 1시 00분
대학에 진학한 후 당시 교수님의 레슨에 적응하려면 내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필요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교수님은 매번 내 음악에 자신감이 없는 것과 그러므로 음악이 전개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늘 혼을 내셨다.
예고에 진학했을 때 느꼈던 벽보다 더 높은 수준의 벽을 느끼다 보니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작아졌다. 점점 내 한계 앞에서 무너진다고 생각했기에 하나씩 포기했고 포기에 익숙해졌었다. 그러다 보니 그 어떤 동료, 후배, 선배들보다 성실하지 못했다.
인생의 지혜가 궁금했다. 삶에 대한 조언을 얻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서양 철학 교양 수업들에 관심이 갔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이성과 감성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은 나로 하여금 내 내면에 자리한 우울감에 도전장을 내밀게 했다.
내 우울감을 제대로 직면해 그 끝을 알고자 했다. 불편한 진실에 온 몸을 던져 깊이 생각하고 마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를 마주하는 것조차 미숙했기에, 그저 지배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성장기에 풀지 못해 오래 묵혀온 분노와 슬픔은 내 자신과 모든 사람들을 향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혐오스럽게 여겼고, 모든 것을 미워했다. 그 시간들이 고통스러워 나를 마주하는 것을 다시 포기하고 닫아두었다가 다시 마주하기를 반복했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상태였던 것 같다. 음악 또한 오직 나를 위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참는 게 일상이었던 내 성장기로 인해 나는 감정을 털어낼 줄 몰랐고, 그것을 바깥으로 털어내게 해주는 음악만 골라 들었다. 그렇게 한 달에 몇 번 어두운 방 안에서 눈물을 토해낼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스크리아빈 음악을 꽤 좋아했다. 그는 내면의 세계를 다양한 색채의 음악으로 구현해 냈다. 어쩌면 그의 작품이 내게 위로가 된 이유는 묘한 동질감을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글 이준병 / 편집 이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