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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리의 진심을 들어볼 용기

2023년 10월 24일 오전 6시 00분 대학을 졸업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인해 유학 준비를 접고 군대에 가야 했다. 훈련소에 입소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았었는데 그 기간에는 연습을 핑계로 자주 서울에 갔다. 졸업과 동시에 자취방을 뺐기에 서울에 머물 곳은 없었지만 본가에 있느니 친구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찜질방 생활을 하는 방랑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목표를 잃은 공허한 마음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회색의 시간이었다.
시간은 흘러 군에 입대했고 군악대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몸을 굴리며 정해진 규칙대로 생활하니 머리는 맑아졌고 부정적인 잡생각 또한 사라졌다. 뭐든 두려워하는 마음을 누르고 시도해 보자는 건강한 생각이 서서히 자리 잡혀 자존감이 성장하는 첫 경험을 한 것 같다.
피아니스트 이준병 군 복무 시절 연주, Grieg Piano Concerto in A minor, Op 16
군악대에서는 다른 분야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며 견문이 넓어진 것도 꽤 중요한 경험이었다.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합주실로 갈 때마다 들려오는 재즈와 실용음악은 음악이 주는 다른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편견이 벗겨지니 새로운 시야로 현상을 보게 되었고 이는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음악적으로는, 어떤 곡을 연주하며 느끼는 감정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인지하는 것이 연주자의 의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려면 나는 왜 연주에 있어 감정을 다루는 것이 아닌 그것에 파묻히고 싶어 하는 지를 바라보아야 했다.
극도로 낮은 자존감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내가 만드는 소리까지 혐오해 왔다. 그렇기에 이를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두려웠고 두렵기에 내가 만드는 소리를 듣는 것을 회피해 왔던 것이었다. 마치 취중의 사람처럼 돋아나는 강한 감정에 나를 맡겨버리고 싶었다. 내가 진심으로 그런 연주를 원했다면 졸업 연주 후에 느꼈던, 후련함 뒤에 밀려오는 찝찝함과 불편함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런 연주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마음에 숨겨 두었던 진심이었다.
피아니스트 이준병 졸업 연주 중, Scriabin Fantasie in B minor, Op. 28
감정에 취한 채 연주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나를 숨기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음들은 그저 악보에 오직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답거나 슬플 수 있는데 나는 감정에 음들을 쏟아버리고 그 혼돈에 나를 숨겼다.
군 복무 시절 피아노를 그만둘까 망설였던 시기도 있었으나, “피아노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적이 있었나”라는 자문에 자신이 없었다. 항상 도망쳤고 요행이 따르길 바랐던 비겁한 사람이었다. 내 안에 깊게 자리했던 자기혐오와 두려움 그로 인한 회피 앞에서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쫄지 말고 시도하자”라는 메시지는 이제 단순 자기최면을 넘어 나 자신과의 정면승부를 알리는 선전포고가 되었다.
글 이준병 / 편집 이지호
이준병, ARTIST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