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일상을 담아내고자 했던 시기가 있었다. 일종의 회피였을 것이다.
충분한 수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꿈을 그려냈다. 현실의 나와 조금, 혹은 아예 동떨어진 내가 또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꿈속의 나는 ‘나’이지만 ‘내’가 아니다. 그 꿈이 꼭 행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무섭거나 슬프거나 끔찍한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깨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잠시나마 현실을 벗어나 내가 아닌 나의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일상 속에서 꿈을 찾기도, 꿈과 일상을 잇기도, 그 둘을 분리하기도 한다.
이불은 문(門)이다. 이 곳과 저 곳의 중간지점인 셈이다. 하지만 허허벌판 속 문(門)만 존재한다는 것은, 꼭 우리가 문으로 통하지만은 않는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그 둘은 함께 있는 동시에 이불을 기점으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어느 쪽이 현실인지, 어느 쪽인 꿈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애매모호한 것, 나는 스스로 그것들의 정의를 찾아가지만 정확한 답을 섣불리 내진 않았다.
_
이불을 다시금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내면을 담아내고자 출발한 소재이자 영원히 안에 속할 줄 알았기에
나를 덮어 보호하고, 동시에 외부와 차단하게 되는 방패이자 높은 벽이 이제는 세상을 담는다.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 써도, 커튼으로 가려보아도, 안개 속에 파뭍혀있어도, 그 안에 무언가 '존재한다'라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아니 어쩌면 명확히 알고있다.
그를 없는체 하는 것은 어쩌면 능동적 무지를 통해 단순히 회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회피는 편하다. 적당한 합리화와 그 어떤 것에 맞서지 않는다는 건 피로하지 않고, 그저 순응하며 살면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눈으로 전부 보이지 않는 것에 다가서려함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선사하곤 하기에.
그렇지만 그대로 외면하며 살아가기엔, 우리는 편하게 살지 못한다.
알고자하고, 나아가고자, 바뀌고자 하는 욕구, 그 덕에 나약한 인류는 긴 인류대 속에 살고 있지 않는가.
불편함에는 생각이 따른다. 생각이라는 벽을 넘고 나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넘기 전에는 절대 알지 못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