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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민

성소민 / Landschaft / 목판새김에 혼합재료 / 20× 30cm / 2024 / 300,000
성소민 / Landschaft / 목판새김에 혼합재료 / 30× 40cm / 2024 / 300,000

작가노트

나의 작업은 질감과 이미지의 단편으로 영구함의 속성을 탐색하는 데에 있다.
평평한 면을 가로질러 파헤치고 그 주위로 두터운 안료를 쌓아올려 만들어낸 거친 단면에는 모종의 쾌(快)가 있다. 빈 화면에서 이루어지는 창작의 즐거움에 앞서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처음 발자국을 남길 때와 같은, 일견 파괴적인 쾌감은 적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적 정서일 것이다. 파괴라 하면 어감이 퍽 강렬하다. 대신에 흔적을 남긴다 하면 어떤가. 그것도 봄이 오면 녹고 마는 눈에 남기는 족적이 아니라 영구히 남을 수 있는 흔적이라 하면, 이는 곧 역사라는 단어로 치환된다.
가로세로로 직조된 논밭의 형상 또한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1만 미터 하늘 위의 성층권에서 내려다보아도 선명한 오랜 밭고랑은 내가 그토록 소망했던,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재현이었다. 오랜 세월 반복된 노동을 통해 무지(無地)였을 땅에 아로새겨진 누군가의 삶이 지난 5년간 기억을 흔적으로 남기고자 했던 나의 작업과 맞닿아 있었다. 대지를 거쳐간 아무개와 그 조상들의 삶과 생존을 위한 행위에서 발견한 형태적·의미적 쾌는 내가 기꺼이 그것에 동참하여 그들의 기억을, 땅의 흔적을 목판 위로 끌어오게끔 하였다.
새김은 기억의 증거이자 쾌로이다. 나무조각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탈락시키고 나는 나의 심상을 채워나간다. 충동과 계획의 사이에서 거듭 칼질을 한다. 판면에 결핍이 늘어갈 때마다 가슴 속이 꽉 차오르는 감각이 있다. 몰두하고 반복하며 새겨넣은 증거와 단서들은 구체적인 형태보다 단순한 선의 새김과 면으로 중첩되는 구성으로 화해, 선면의 대비감과 더불어 파내고 쌓는다는 정반대의 행위를 통해 역사를 불러낸다. 이처럼 역설적인 형성의 과정은 평면의 구도를 요철이 드러나는 기법으로 재현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관조하듯 넘겨다보는 부감시의 서술적 속성에서 벗어나 새김의 형식으로 개입한 깊은 관심은 저 먼 땅의 흔적을 깨운다. 그리하여 목판 위에서 반복적으로 교차되고 엮이는 행위와 형상은 퇴적되는 기억과 영구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본 전시의 <Landschaft> 연작은 보다 간결한 접근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중첩된 안료의 질감에 집중한 두 점의 소품 작업은 직관적으로 여러 겹의 층위를 드러내며, 좁고 깊은 새김의 길은 회화적 표면 위에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