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 대산 / 비단에 천연안료 / 50×92cm / 2022 / 2,100,000
김은정 / 동행 / 비단에 천연안료 / 39×55cm / 2022 / 700,000
작가노트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 모퉁이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는 좁은 오르막길에 인접해 있었고, 그사이에 커다란 밤나무가 자라나 고개를 넘는 뒷마을 어르신들은 종종 그늘 아래 바위에 기대어 쉬어가시곤 하셨다. 나와 옆집 현정이는 길가에 자란 보드라운 넝쿨 풀을 뜯어다 어른들이 앉아 쉬시던 곳에 돗자리를 만들고 누워 밤나무를 올려다보곤 했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는 모습을 아름답다 여기면서도 이상하게 다 익지도 않은 밤송이가 떨어질까 겁이 났다.
그 날의 밤송이는 내 인생의 복선이었던 걸까, 현재의 나는 나무 그늘 대신 에어컨이 풀 가동 중인 회색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 오랜 지인과의 편안한 대화 속에서, 체온과 같은 따뜻한 바람이 부는 계절 안에서 어김없이 그날의 기억이 향수가 되어 가슴을 애린다.
우리는 모두 ‘사회화’라는 명분으로 ‘도시화’에 강제 적응 기간을 거쳤다. 도시에서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규정한 것들에는 늘 인류애의 상실과 함께 자연의 상실이 동반된다. 어쩌면 인간은 도시 안에서 상실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는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도시화, 기계, 문명, 그런 것들이 갖춰져 있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의 삶은 완성되어 있었다. 새것을 입고 먹고 쓰며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나의 영혼은 여전히 밤나무 아래에 머물러 있다.
상실과 생명이라는 주제로 자연을 다루기 위해 나에게 익숙한 <동궐도(東闕圖)> 기법을 차용하였다. 동궐도의 풍경을 오려 붙이듯 재구성하여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의 시점을 여러 차원으로 분리하여 만든 공간들은 의도한 화면이었지만 어느 순간 저절로 본연의 형태를 찾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3차원에서의 구체(球體)를 시작으로, 소멸하기도 증식하기도 하는 비정형의 또 다른 형태로의 변화였고, 두 번째로는 약 200년간의 세월이 담긴 화면 속 어느 곳을 오려 붙여도 선과 색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들이 그러했다. 동궐도에 담긴 비원(祕苑)을 통해 자연은 어느 곳에 무엇을 두든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합이 완료된 다차원의 생태계 곳곳에 천연안료가 채색될 때 역시 본래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생산하려는 목적이 있다. 나는 그와 함께 옛 기법을 연구하고 선(禪)을 수행한다는 명분을 중요하게 여겨왔지만, 작업을 마무리하며 나는 그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을 쫓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럽다는 것, ‘순리에 맞고 당연한, 힘들이거나 애쓰지 아니하고 저절로 된 듯한’ 그 사전적 의미처럼 나는 내 자리에서, 그림 속 화면을 통해 최선의 자연스러움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자연으로 완성되어 있었기에 자연을 담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모습을 담는 것이었다. 내가 경험한 자연의 완전함을 담고자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