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 /로이 베티를 위하여/ 캔버스에 수채화/ 45.5 x 37.9
2024 / 400,000
작가노트
책과 영화를 보고 그림 그립니다
로이 베티를 위하여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 그린 그림.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적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해, 영화라는 매체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대답이다.사이버펑크 장르의 시조새와도 같은 이 영화에는 무신론자를 위한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이 있고, 유신론자를 위한 예수의 산상수훈이 있다. 인본주의자를 위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의 소크라테스가 있으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뉘른베르크의 나치 전범들 또한 이 영화에 있다.블레이드 러너가 개봉된지 정확히 10년 후인 1992년, 홀로코스트 이후 인간성의 말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우리에게 인간성에 대한 오래된 질문들을 계속해서 상기해봐야 한다는 것, 또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어떻게 하면 좀더 인간의 존엄이 보존되고 존중받는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이상의 제노사이드 범죄가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런 정답이 없는 질문들을 계속 생각해야 하는 이유, 즉 철학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명백하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정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정답에 가까워진다는 것 또한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발견하고 성취하는 모든 지적 활동의 산물들은 우리를 이롭게 한다. 누가 아는가? 우리가 계속 생각하고 고민한다면 어쩌면 앞으로 100년간은 제2의 보스니아 내전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계속 생각하여 그 지적 유산을 후대에도 남겨준다면 앞으로 1000년간도, 10000년간도 없을 수 있는 것이다.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카가 말했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문학이나 영화나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일종의 끊임없는 대화다. 밀란 쿤데라가 자신의 작품으로 불멸성을 획득하는 작가들을 조명했듯, 모든 창작자는 창작물이 후대에도 계속해서 비평됨으로써 사실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40년 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쿤데라도 해당되고, 2800년 전에 일리아드를 쓴 호메로스도 해당된다. 영화는 이런 문학의 역사에 비하면 그 역사가 짧으나, 영화평론이라는 것이 문학비평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한 분야로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고려한다면, 영화 또한 당연히 대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 또한 내 작품과 해석으로 리들리 스콧과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