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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진

청사진 / 힘과 벽 / Printing / 90 x 90 / 2024 / 1,500,000
청사진 / 미궁(迷宮) / Graffiti / 90 x 90 / 2024 / 1,500,000

작가노트

어릴 적부터 나는 원인 모를 불안 속에서 살아왔다.
이 감정은 종종 죽음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나는 이 불안의 원인을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불안은 “왜 사는가?”와 “왜 살아야 하는가?” 두 질문으로 요약된다.
두 질문은 유사하지만 같지는 않다.
전자는 존재의 이유에 관한 물음이고, 후자는 존재지속의 이유에 관한 물음이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태어남이란 생태적인 원리에 따라 세상에 던져지는 것일 뿐이다.
존재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왜 사는가? 그저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직 죽음만이 이 세계로부터 존재를 벗어나게 한다.
그런데 태어남은 선택이 아니지만 죽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수많은 인간의 삶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퇴적된다.
모두 저마다의 성벽을 쌓고 거창한 이념과 환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떤 견고한 벽도 죽음을 거부하는 육체의 본능을 막을 수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더 먼저 익힌다.
그렇기에 사실 죽음을 거부하는 본능은 한순간도 벽 바깥에 있던 적이 없다.
죽음을 향한 돌이킬 수 없는 경주에서 소멸의 위협을 마주치면 육체는 뒤로 물러난다.
이것이 “왜 살아야 하는가?”의 대답이다. 우리의 소멸을 거부하는 그 의지가 다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본능에서 출발하여 본능에서 끝나므로, 그 본능을 거스르는 거대한 의지 앞에서는 매우 위태롭다.
그렇기에 나의 작품은 결론이 아닌 과정이자 배설이다.
죽음이 두려워서 살며, 끊임없이 타인과 소통해야 하는 세계에서 느끼는 고통은 다시 내게 죽음을 꿈꾸게 한다.
우리는 같은 사건을 체험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기에 철저히 독립된 개체이며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다.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은 다르며, 나의 슬픔과 당신의 슬픔 또한 다르다.
그러나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야 함에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공간이기에, 살아간다는 것은 곧 소통의 지속이다.
힘, 죽음을 거부하는 육체의 본능은 강력한 힘이다.
벽, 소통할 수 없는 타인은 견고한 벽이다.
미궁, 나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항은 죽음이란 종점까지 어지럽게 얽혀있는 미궁이다.
죽거나, 미궁이 스스로 무너지기 전까진 탈출할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소리없는 소리